아버지와 카나다.


2016년 7 29. 15년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아내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입국 수속을 밟았다우리는 외국인 줄에 섰다캐나다 여권을 제시하니 사진을 찍어야 한단다입국 기념 사진으로 생각했다버스를 타려고 나왔다. 17년차 촌뜨기 커네디언 부부에게 그해 한국의 여름은 너무 뜨거웠다온갖 촌발을 날리면서 버스표를 사고아버지 빈소로 직행하는 버스에 올랐다.

인천 공항은 추억이 있는 곳이다캐나다로 떠나기 전에 당시 송기수김석붕 차장과 인천 공항 프로젝트 진행을 위해 배를 타고 다녔던 곳이었다펄앤딘 (Pearl & Dean)이라는 프랑스계 옥외 광고 회사와 콘소시움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였는데마지막 준비를 위해 회사 꼭대기층 회의실 구석에서 새우잠을 잤던 기억도 잠시 떠올랐다.

버스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기대와는 달리 많이 낯설지 않았다처음 보는 하이웨이를 버스는 별 막힘 없이 달렸다신촌이대 후문사직동을 지난다까마득한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사직동은 서울국제법연구원이 있는 곳이다나의 대학원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고아내와 오붓하게 데이트도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이었다.

광화문을 지나면서 나는 동생에게아내는 처형에게 전화를 했다서울대 병원 앞에서 내려서 가방을 끌고 아버지 빈소로 향했다어머니를 뵈었다항암 치료를 받고 계시는 어머니는 그래도 고우셨다아버지 영정을 뵈었다죄송했다빈소는 천주교식으로 준비했지만제수씨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서 불편하지는 않았다그동안 많은 수고를 한 동생들과 제수씨들이 고마웠다처음 보는 조카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인사하는 모습들이 예뻤다.

연락을 많이 못 드렸는데 많은 분들이 위로해주셨다반가움과 고마움이 앞서서 슬픔을 느낄 새가 거의 없었다오랜만에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함이었다가족친구동료선배 그리고 후배이민의 삶에서 잘 모르고 살던 따뜻함이었다항상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큰형한테 동생들은 별 불평도 없었다제수씨들에게는 그저 수고해줘서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3일장을 치르고 발인에 앞서누워계시는 아버지를 뵈었다뇌졸증 후유증으로 오래 고생을 하셨지만이제 편해 보이셨다어쩌다 전화를 드리면 보고 싶다고 하셨고장성한 손자손녀도 보고 싶다고 하셨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사실 나는 그리 좋은 아들이 아니었다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친구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아들인 내가 아버지의 친구가 되는데 실패했다아버지와 한번 틀어진 그 일 때문에 나는 계속 화가 나있었다참 나쁜 아들이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아내와 나는 아예 귀국을 할까하는 생각을 했다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함과 안도감이 좋았다좀 더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마침내, 2주 동안의 한국행을 마치고 우리 딸이 허스키 두 마리를 데리고 지키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딸은 그동안 에어컨도 빵빵하게 틀어놓고심심하면 차 몰고 나가서 친구도 만나고근처에 있는 카페에 가서 맛있는 것도 사먹고 나름 잘 지냈던 것 같다일하고 있는 아들에게 잘 도착했다고 문자를 했다평소에 문자를 하면 보통 하루 있다가 응답이 오는 아들한테서 곧장 답이 온다. “Welcome home!” 허스키 써니싸샤도 반갑다고 난리다.

사실한국에 있는 동안 꿈을 꿨다캐나다 집을 비워놓고 한국에 왔는데비행기가 컨펌이 안 돼서 애를 태우고 있고그동안 집은 엉망이 돼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일종의 악몽이었다그래서 비행기가 캐나다 상공에 접어들고 캐나다 땅이 보이기 시작하자 안도감이 들었다이번에 이 안도감은 집 (HOME)과 가족 (FAMILY)이 있는 곳에서 느낄 수 있는 안도감이었다드디어 집에 왔구나내 아이들이 있고집이 있고생활의 터전이 있는 곳이 여기구나아내와 얘기를 나눴다아직은 돌아갈 때가 아닌 것 같다는데 합의를 봤다우리가 오래 전에 이민을 생각했던 그 이유들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고 여기서 할 일도 아직 많기 때문이었다힘들더라도아이들이 가정을 이루어 완전히 독립하고 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재미있는 것은, Deja Vu랄까캐나다라는 나라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이 바로 아버지를 통해서였다아버지의 동료였던 미국 분이 한국에서 근무를 마치고 정착하신 곳이 카나다인데, ‘카나다는 땅이 넓어서 사람들이 집을 1층으로 넓게 지어서 산다.’고 하시면서 그분이 보낸 엽서를 보여주셨었다아버지도 가시고는 싶지만덩치 큰 백인들과 어떻게 상대가 되겠냐며 생각을 접었다고 하셨다그래서 장손이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캐나다로 간다고 했을 때쉽게 승락을 해주셨던 것 같다.

지난 3월에 어머니께서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영정 사진 속의 어머니도 참 밝고 편안하게 보이셨다생전에 잘 모시지 못한 것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저 위에서 뵙게 될 때죄송하고 이제는 괜찮다고 말씀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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